△ 중국 인민의 심장 천안문 광장(天安門廣場, Tian'anmen Square)
■ 중국 인민의 심장, 천안문 광장(天安門廣場, Tian'anmen Square)
- 주소 : 北京市东城区 天安门广场, Tiananmen Square, Dongcheng, Beijing
- 전화 : (+86) 010 6511 8713
- 홈페이지 : ☞ https://plus.google.com/101082628766466420381/about?gl=kr&hl=ko
- 운영시간 : 05:00 ~ 22:00
- 찾아가는 길 : 지하철 1호선 천안문동(天安門東)역 C·D 출구 도보 1분
베이징(北京)의 정중앙에 위치한 천안문 광장은 천안문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북으로 약 880m, 동서로 약 550m에 이르는 총 면적 44만㎡의 거대한 광장으로 약 10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광장이다. 1651년 처음 설계된 후, 1958년 확장 공사를 거쳐 현재의 규모가 되었다. 천안문 광장 중앙에 1952년 8월 인민영웅기념비를 착공하기 시작하여 1958년 4월 완공되었다. 기념비의 정면에는 "인민영웅은 영원히 잠들 뿐 사라지지 않는다"는 마오쩌둥의 기념문이 새겨져 있다. 1999년 건국 50주년을 맞아 광장 바닥 공사를 새로 하였고, 조명과 녹지를 조성하여 세계 최고 규모에 걸맞는 모습을 갖추었다. 천안문 광장에는 인민영웅기념비, 모주석기념당, 중국국가박물관, 인민대회당(국회의사당)이 위치하고 있으므로 한나절 시간을 두고 여유롭게 관광을 즐겨보자.
2월의 천안문 광장은 아직 찬바람이 스며든다. 따땃한 핫팩을 주머니에 넣고 광장 구석을 따라 거닐며 이 곳을 찾은 중국인들을 구경하고 있자니 이곳 저곳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 일색이다. 이 사람들 사진을 참 좋아한다. 그런 까닭일까. 광장 곳곳에는 사진사들이 천안문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준다며 외쳐댄다. 나도 여느 유명한 관광지에 들르면 기념 사진을 찍곤 하는데, 이 곳에선 사진에 열성적인 중국인들 틈에서 기념사진 찍자니 조금 쑥쓰럽다는 핑계로 천안문 광장에서는 기념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하고 말았다.
△ 중국의 상징, 천안문(天安門)
■ 중국의 상징, 천안문(天安門, Tian'anmen)
- 요금 : 성루 등정료 15元(학생 5元)
- 개방 : 08:30 ~ 16:30
중국 황제가 살았던 궁전의 정문인 천안문(天安門). 천안문 정면에는 마오쩌둥(毛澤東) 초상과 국가 문장이 걸려있고 중국의 상징과도 같은 곳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베이징에서 가장 먼저 찾는 곳이다. 1417년 명(明)나라 영락제 때 건설되어 승천문(承天門)으로 불리었다. 1457년 낙뢰를 맞아 파괴되었고, 1644년 이자성의 농민군에 의해 불태워졌다가 17세기 명나라가 멸망한 후 청(靑)나라 순치제에 의해 1651년 재건되며 천안문(天安門)이라 불리게 된다. 건설된 천안문은 중국 황제가 살았던 황실의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선포 장소로 중국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다.
△ 천안문 광장에 위치한 국기 게양대(国旗揭扬台)
■ 중국 인민의 꿈, 천안문 광장의 국기게양식/하기식(國旗昇降式)
천안문 광장의 국기 게양대에서는 매일 중국 국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오성홍기(五星紅旗)가 게양된다. 국기 게양식은 일출 시간 때, 하기식은 일몰 때로 시간이 들쑥날쑥하다. 많은 인파가 몰리기 때문에 가까이서 구경하고 싶다면 해뜨기 1시간 전, 해지기 1시간 전 쯤 미리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한다. 매년 5월 1일 노동절(勞動節, Labor Day)과 10월 1일 국경절(國慶節, National Day)에 국기 게양식/하기식은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되는데 이 때 몰리는 인파로 광장 주변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지방에 살고있는 중국 인민들은 이 곳에서 국기게양식을 보는 것을 일생일대의 과업으로 삼는다고 한다. 떠오르는 오성홍기를 바라보는 중국인의 모습을 보면 장엄함마저 느껴진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이 천안문 성루에 올라 개국대전(開國大典, The Birth Of New China) 개최하며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성립하였다. 이후 국경절(10.1)은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수립일, 즉 개국기념일로 춘절(春節), 노동절(勞動節)과 함께 중국 최대의 명절로 손꼽힌다.
△ 천안문 광장을 지키는 경비병 공안(公安)
■ 천안문 광장에서 벌어진 대학살, 천안문 사건(1989. 6. 4)
1980년 중국은 개혁개방을 단행한게 되는데, 개혁개방 이래 중국은 매년 10% 가까운 고도성장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도시 내에서 빈부 격차와, 농촌간의 소득 격차 등 다양한 사회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더욱이 1980년대 말은 세계사 적으로도 경동의 시기였다. 사회주위권으로 상징되는 소련이 정치와 경제 개혁을 단행하고, 동유럽 국가들도 자본주의에 편입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혼돈의 정세 속에서 중국공산당 총서기였던 후야오방(胡耀邦:호요방)이 사망하게 되고, 그의 죽음은 북경대 학생들이 시작하고 시민들이 합세하여 대규모 군중 집회로 발전한 천안문 사건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1989년 4월 15일 그는 당내 보수파와 논쟁 도중 졸도하였고 그대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수 많은 음모론이 제시되었으며 학생들은 후야오방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모여들어 인민영웅기념비 행렬을 하게 된다. 4월 17일 대학생 수백 명이 천안문 광장에서 시위를 시작하고 , 시위는 이내 확대되었다. 4월 22일 시안(西安)에서 진행된 후야오방의 장레식에서 군중 300여명이 차량에 불을 지르는 등 시위가 더욱 확대되기에 이른다. 4월 27일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은 이를 '반혁명 폭란'으로 규정하였고, 5월 20일~6월 3일까지 베이징 시 여러 지역과 천안문 일대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1989년 6월 4일 새벽 1시 30분 '긴급통고' 이후 새벽 4시 중국 정부가 계엄군을 통해 시위대 진압 명령을 내리며 진압 작전을 펼치고 유혈사태가 벌어진다. 다음날 중국 정부는 언론을 통제하고 '6월 4일 천안문 광장에서는 한 사람의 사망자도 없었다. 학생들은 해산했고 총에 맞거나 전차에 치인 학생도 없었다. 폭도들이 소란을 피운 곳은 다른 곳이다. 폭도들은 군인에게 총을 탈취하여 국가를 전복시키려 하고 있다. 이 전투에서 사망자는 300여 명인데 희생자의 절반은 군인이며, 절반은 폭도 및 질 나쁜 구경꾼들이다'라고 발표했다. 영국의 BBC방송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사망자만 7천 명에 이르고, 부상자는 수만 명에 달한다고 알려졌다. 천안문 광장에서 대피한 시위대의 학생 대표들에게 수배령이 내려졌고, 잡히면 총살당했다.
사건 이후 전 세계는 중국의 야만성에 격분했고, 많은 서방 국가들이 중국에 비난을 쏟아냈다. 덩샤오핑의 정치적 입지가 흔들렸고 이내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사건의 여파로 2000년 베이징 올림픽 도전은 실패로 이어지고, 중국에 병합될 예정이던 홍콩은 공포로 인한 이민 열풍이 불었다고 한다. 지금도 매년 6월 4일을 전후하여 천안문 광장에는 대륙 공안이 대규모로 배치되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고 있고, 검색엔진(중국어 구글)에서도 중국 국무원의 요청으로 천안문 사태에 대해 정보검색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 1976년 천안문 사건(1976. 4. 5) - 중국 마오쩌둥 체제 말기 1976년 있었던 대중반란으로, 중국 문화대혁명 이래 마오쩌둥 사상 절대화 풍조와 가부장 체제에 대한 중국 민중의 저항을 나타낸 사건이었다.
○ 1919년 천안문 사건(1919. 5. 4) - 오사운동(5.4운동)으로 알려진 1919년 천안문 사건은 러시아 혁명(1917)의 영향을 받아 베이징 대학의 교수, 학생들을 중심으로 확산한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혁명 운동이다. 중국공산당의 신민주의 혁명의 출발점으로 평가되기도 하며 근·현대사의 중요 사건으로 일컬어진다.
△ 천안문에 걸린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 주석, Mao Zedong) 초상
■ 중국의 초대 주석,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
마오쩌둥(毛澤東)은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초대 국가 주석이다. 1893년 청나라 후난성에서 농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3세(1905)에 학업을 중단하고 아버지의 강요로 집안의 농장에서 일을 한다. 그러나 공부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후난 성립 제일사범학교까지 졸업하고 베이징 대학에 취직하여 도서관 사서 보조로 근무하게 된다. 1919년 5.4운동 발발 후 후난 학생연합회를 설립하고 <샹장평론(湘江評論)>을 펴냈으나 곧 금지당하고, 베이징으로 넘어가 러시아 혁명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1921년 8월 상하이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1차 전당대회 창립대회에 참석하여 회의 서기를 맡아 보았고, 10월 후난성 지부 서기로 취임하게 된다. 1924년 국공합작이 되자 공산당 중앙위원, 중앙집행위원 등을 거쳐 1931년 중화 소비에트정부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이 되었다.
1945년 4월 연합정부론을 발표하고 중앙위원회 주석이 되었고, 전쟁 후 국민당과의 내전(1946~1948)을 승리로 이끈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毛澤東)은 천안문 성루에 올라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공표했고 국가 주석 및 혁명 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된다. 이날 이후 천안문은 황궁의 정문에서 중국의 상징으로 탈바꿈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59년 국가 주석을 사임하고, 1965년 당내에서 고립되어 연금되었으나 1966년 문화대혁명을 통해 다시 권력을 잡았다. 1976년 4월 발발한 천안문 사건(天安門事件) 이후, 위대한 영웅이자 독재자 마오쩌둥은 고립된 채 82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 주석)에 대한 평가는 아직가지 분분하다. 중국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중국의 독립과 주권을 회복하게 한 점. 중국을 통일하고 대중의 정치 참여를 이끌어낸 점은 높이 평가된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중국 전통 문화의 유실 및 대학살로 많은 인명을 죽인 독재자로 비판받기도 한다.
[중국, 북경] 중국 인민의 심장 천안문 광장(天安門廣場, Tian'anmen Square)
FEB 2014
Liah
'여행의 실루엣 > 해외 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 북경] 베이징의 삼청동 난뤄구샹(南锣鼓巷, Nanluogu Xiang) (0) | 2014.04.05 |
---|---|
[중국, 북경] 광동 음식 전문점 일창찬관(日昌餐馆, Otto's Restaurant) (0) | 2014.03.31 |
[중국, 북경] 13인의 황제가 잠든 명13릉(明十三陵, Ming Dynasty Tombs) (0) | 2014.03.30 |
[중국, 북경] 민속 공연을 즐길 수 있는 전통 찻집 라오서차관(老舍茶館, Laoshe Tea House) (0) | 2014.03.30 |
[중국, 북경] 베이징 도심 속의 빌딩숲 건외소호(建外SOHO), 스타벅스 (0) | 2014.03.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