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 검은 숨
- 67p.
어스름이 내리자 새들이 울음을 그쳤어. 낮에 울던 풀벌레들 보다 가냘픈 소리를 내는 밤의 풀벌레들이 날개를 떨기 시작했어. 완전히 어두워지자, 간밤에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의 그림자가 내 그림자에 닿아왔어. 어른 어른 서로의 언저리를 어루만지다 우리는 흩어졌어. 어쩌면 우린 낮 동안 뙤약볕 아래 꼼짝 않고 머무르며 비슷한 생각에 골몰해 있었던 것 같았어. 밤이 되어서야 몸의 자력으로로부터 얼마간 떨어져나올 힘을 얻은 것 같았어. 그들이 다시 오기 직전까지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어루만졌고, 서로를 알고 싶어했고, 결국 아무것도 알아 내지 못했어.
-74p.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처음엔 차디찬 몽둥이 같았던 그것,
순식간에 뱃속을 휘젓는 불덩어리가 된 그것,
그게 반대편 옆구리에 만들어놓은, 내 모든 따뜻한 피를 흘러 나가게 한 구멍을 생각해.
그걸 쏘아보낸 총구를 생각해.
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
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잠든 그들의 눈꺼풀 위로 어른거리고 싶다, 꿈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싶다, 그 이마, 그 눈꺼풀들을 밤새 건너다니며 어른거리고 싶다. 그들이 악몽 속에서 피 흐르는 내 눈을 볼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 80-82p.
우리들의 몸은 계속 불꽃을 뿜으며 타들갔어. 장기들이 끓으며 오그라들었어. 간헐적으로 쉭쉭 뿜어져나오는 검은 연기는 우리들의 썩은 몸이 내쉬는 숨 같았어. 그 거친 숨이 잦아든 자리에 희끗한 뼈들이 드러났어. 뼈가 드러난 몸들의 혼은 어느샌가 멀어져, 더이상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느껴지지 않았어. 그러니까 마침내 자유였어, 이제 우린 어디든 갈 수 있었어.
어디로 갈까, 나는 자신에게 물었어.
누나한테 가자.
하지만 누나가 어디 있을까.
난 침착하고 싶었어. 탑 아래쪽에 쌓인 내 몸이 완전히 다 타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어.
나를 죽인 그들에게 가자.
하지만 그들이 어디 있을까.
공터의 축축한 모래흙에, 거기 드리워진 검푸른 숲그늘에 어른거리며 나는 생각했어. 어떻게, 어디로 가야 할까. 괴롭지 않았어, 썩어가던 내 거뭇한 얼굴이 이제 깨끗이 사라질 것이. 아깝지 않았어, 그 치욕스러운 몸이 남김없이 불타버릴 것이. 목숨을 가졌을 때 그랬던 것처럼 난 단순해지고 싶었어. 아무것도 두려워하고 싶지 않았어.
너에게 가자.
그러자 모든 게 분명해 졌어.
서두를 것 없었어. 해가 뜨기 전에 날아오르면 불빛이 모여 있는 도심으로 가는 방향을 찾을 수 있겠지. 동터오는 거리를 더듬어 너와 내가 살던 집으로 어른어른 나아갈 수 있겠지. 어쩌면 넌 그동안 누나를 찾아냈을지도 몰라. 너를 따라가면 누나의 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 몸 언저리에 어른거리고 있는 누나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아니, 누나는 이미 우리가 살던 방에 돌아와, 나를 기다리며 그 창틀에, 차가운 댓돌 위에 어른거리고 있을지도 몰라.
#3장 - 일곱개의 뺨
-102-103p.
이 희곡집은 이제 출판할 수 없다. 처음부터 헛수고를 한 것이다.
앞쪽에 열 페이지에 드문드문 살아남은 문장들을 그녀는 머릿속으로 더듬는다.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 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
거칠게 꿰매어진 문장들, 문단째로 검게 지워진 자리들, 우연히 형상을 드러낸 단어들을 그녀는 생각한다. 당신을. 나는. 그것은. 아마도. 바로. 우리들의. 모든 것이. 당신은. 어째서. 바라 봅니다. 당신의 눈은. 가까이에서 멀리에서. 그것은. 또렷이. 지금. 좀더. 희미하게. 왜 당신은. 기억했습니까.
숯이 된 문장과 문장들 사이에서 그녀는 숨을 몰아쉰다. 어떻게 분수대에서 물이 나옵니까. 무슨 축제라고 물이 나옵니까.
칼을 찬 장수의 검은 동상을 등지고, 멈추지 않고 그녀는 걷는다. 목도리를 눈 밑까지 올리고는 숨을 쉴 수 없어, 시큰거리는 붉은 광대뼈를 드러낸 채 걷는다.
#4장 - 쇠와 피
- 148-149p.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도청앞 스피커에서 연주곡으로 흘러나온 애국가에 맞춰 군인들이 발포한 건 오후 한시경이었습니다. 시위 대열 중간에 서 있던 나는 달아났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산산조각나 흩어졌습니다. 총 소리는 광장에서만 들리는 게 아니었습니다. 높은 건물 마다 저격수가 배치돼 있었습니다. 옆에서, 앞에서, 맥없이 쓰러지는 사람들을 버려둔 채 나는 계속 달렸습니다. 광장에서 충분히 멀어졌다고 생각됐을 때 멈췄습니다. 허파가 터질 듯 숨이 찼습니다. 땀과 눈물에 얼굴이 흠뻑 젖은 채 셔터가 내려진 상점 앞 계단에 주저앉았습니다.
- 152p.
다음의 일은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더 기억하라고 나에게 말할 권한은 이제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선생도 마찬가집니다.
아니요, 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
#6장 - 꽃 핀 쪽으로
- 249p.
하지만 죽은 다음의 세상을 나는 모른게. 거그서도 만나고 헤어지는지, 얼굴이 있고 목소리가 있는지, 반갑고 서러운 마음이 있는지 모르게. 느이 아부지 잃은 것을 가엾어해야 하는지,
부러워해야 하는지 어떻게 내가 알었겄냐.
그저 겨울이 지나간게 봄이 오드마는. 봄이 오먼 늘 그랬드키 나는 다시 미치고, 여름이먼 지쳐서 시름시름 앓다가 가을에 겨우 숨을 쉬었다이. 그러다 겨울에는 삭신이 얼었다이. 아무리 무더운 여름이 다시 와도 땀이 안 나도록, 뼛속까지 심장까지 차가워졌다이.
#에필로그 - 눈 덮인 램프
- 280p.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목이 길고 옷이 얇은 소년이 무덤 사이 눈 덮인 길을 걷고 있다. 소년이 앞서 나아가는 대로 나는 따라 걷는다. 도심과 달리 이곳엔 아직 눈이 녹지 않았다. 얼어 있던 눈 더미가 하늘색 체육복 바지 밑단을 적시며 소년의 발목에 스민다. 그는 차가워하며 문득 고개를 돌린다. 나를 향해 눈으로 웃는다.
< 소년이 온다 >
한강 지음
창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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