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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지/추억의 책장 · 메모

[안희연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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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형태 - 36-37p. 

 

버리려고 던진 원반을 기어코 물어 온다

쓰다듬어달라는 눈빛으로

숨을 헐떡이며 꼬리를 흔드는

 

저것은 개가 아니다

개의 헝상을 하고 있대도 개는 아니다

 

자주 물가에 있다

땨로는 덤불 속에서 발견된다

작고 노란 꽃 앞에 쪼그려 앉어

다신 그러지 않을게, 다신 그러지 않을기

울먹이며 돌아보는

 

슬픔에 가까워 보이지만 슬픔은 아니다

온몸이 잠길 때도 읐지만

겨우 발목을 찰랑거리다 돌아갈 때도 있다

 

물풀 사이이 숨은 물고기처럼

도망쳤어도 어쩔 수 없이 은빛 비늘을 들키는

 

풀리지 않는 매듭이라 자신했는데

이름을 듣는 순간 그대로 풀려버리는

 

깊은 바닷속 잠수함의 모터가 멈추고

눈 위에 찍힌 발자국들이 소리 없이 사라진다

 

냄비 바닥이 까맣게 타도록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등 뒤에 있는

이 모든 것



# 아침은 이곳을 정차하지 않고 지나갔다 - 90-91p. 

 

날카로운 말은 아프지 않아

폭풍우 치는 밤은 무섭지 않아

아픈 것은 차라리 고요한 것

울음을 참으려 입술을 깨무는 너의 얼굴

 

너는 투명해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나의 땅은 그럴 때 흔들린다

네가 어떤 모양으로 이곳까지 흘러왔는지 모를 때

온 풍경이 너의 절망을 돕고 있을 때

 

창밖엔 때아닌 비가 오고

너는 우산도 없이 문을 나선다

 

이제 나는 너의 뒷모습을 상상한다

몇걸음 채 걷지 못하고 종이처럼 구겨졌을까

돌아보다 돌이 되었을까

 

나의 상상은 맥없이 시든다

언어만으로는 어떤 얼굴도 만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뿐이다, 나를 스쳐 지나가는 오후

성벽 너머의 성벽들

빗방울이 머물 수 있는 공중은 없듯이

 

알고 보면 모두가 여행자

너도 나도 찰나의 힘으로 떠돌겠지

 

그러나 내일 나에게는 하나의 얼굴이 부족할 것이다

깊은 어둠에 잠겼던 손이 이전과 같을 라 없으므로

그 손이 끈질기게 진흙 덩어리를 빚을 것이므로




# 호두에게 - 118-119p. 

 

부러웠어, 너의 껍질

깨뜨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진심이 있다는 가

 

나는 너무 무른 사람이라서

툭하면 주저앉기부터 하는데

 

너는 언제나 단호하고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

한 선에 담길 만큼 작지만

우주를 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너의 시간은 어떤 속도로 흐르는 것일까

문도 창도 없는 방 안에서

어떤 위로도 구하지 않고

하나의 자세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를 가졌다는 것

너는 무수한 말들이 적힌 백지를 내게 건넨다

 

더는 분실물 센터 주변을 서성이지 않기

‘밤이 밤이듯이‘ 같은 문장을 사랑하기

 

미래는 새하얀 강아지처럼 꼬리 치며 달려오는 것이 아니라

새는 비를 걱정하며 내다놓은 양동이 속에

설거지통에 산처럼 쌓인 그릇들 속에 있다는 걸

 

자꾸 잊어, 너도 누군가의 푸른 열매였다는 거

세상 그 어떤 눈도 그냥 캄캄해지는 법은 없다는 거

 

문도 창도 없는 방 안에서

나날이 쪼그라드는 고독들을




< 창비시선 446 -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

안희연 시집

창비,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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