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 31-32p.
그는 부모에게 반드시 해야 하는 이야기를 생각하다가, 자신의 결정을 이미 돌이킬 수 없음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 결정을 무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었다. 경솔하게 선택한 목표에 도달하기에는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다는 생각도 들고, 자신이 버린 세계가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는 자신과 부모가 잃어버린 것을 슬퍼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이 그 세계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졸업식 내내 이런 상실감을 느꼈다. 이름이 불리자 그는 연단을 가로질러 걸어가서 연한 회색 턱수염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남자에게서 두루마리를 받았다. 자신이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손에 쥔 두루마리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 뻣뻣하고 불편하게 앉아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뿐이었다.
#2 - 47p.
전쟁 선포 후 처음 며칠 동안 스토너도 혼란에 빠져 있었지만, 캠퍼스 내의 사람들 대부분을 사로잡은 혼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나이 많은 학생들이나 강사들과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어도, 사실 그는 전쟁을 그다지 실감하지 못했다. 그런데 전쟁이 이제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자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엄청난 무심함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전쟁 때문에 대학의 일들이 중단된 것에 화가 났다. 자신의 내면에서 강렬한 애국심 같은 것은 찾을 수 없었다. 또한 독일인들을 미워하는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6 - 137p.
그는 오하이오에서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말했다. 그의 아버지는 작은 기업을 상당히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사업가였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기형적인 외모 때문에 고립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고, 일찍부터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으며, 자신의 방어할 방법을 떠올릴 수 없었다고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이 털어놓았다. 그는 길고 긴 낮과 밤을 방에서 혼자 보내며 자신의 일그러진 몸이 강요하는 한계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책을 읽다가 점차 자유로움을 느끼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가 이 자유의 본질을 이해하게 됨에 따라 그가 느끼는 자유로움도 더욱 강렬해졌다. 윌리엄 스토너는 이 말을 들으면서 그에게 뜻밖의 친근감을 느꼈다. 그는 로맨스가 일종의 변화를 거쳤음을 알 수 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을 통해 알게 되는 직관적인 깨달음 같은 것.
#7 - 158p.
그의 말투에 자신감이 붙었고, 그의 내면에서는 따스하면서도 단단한 엄격함이 힘을 얻었다. 10년이나 늦기는 했지, 이제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차츰 알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발견한 새로운 자신은 예전에 상상했던 것보다 더 훌륭하기도 하고 더 못나기도 했다. 이제 비로소 진짜 교육자가 된 기분이었다. 자신이 책에 적은 내용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인간으로서 그가 지닌 어리석음이나 약점이나 무능력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예술의 위엄을 얻은 사람. 그가 이런 깨달음을 입으로 말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 깨달음을 얻은 뒤에는 사람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것의 존재를 누구나 알아볼 수 있었다.
세인트루이스에서 돌아온 이디스도 그가 변했음을 알아차렸다. 어째서 이렇게 변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변했다는 사실만은 즉시 감지했다. 그녀는 연락도 없이 어느 날 오후에 기차로 돌아와서 거실을 지나 서재로 들어왔다. 서재에는 그녀의 남편과 딸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달라진 외모로 갑자기 나타나서 남편과 딸을 깜짝 놀래줄 작정이었지만, 시선을 들어 놀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윌리엄을 보고는 진짜로 변한 사람은 바로 그임을 알아차렸다. 그 변화가 워낙 깊어서 그녀의 외모가 변한 효과쯤은 그냥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조금은 멍하니, 하지만 약간 놀란 마음으로 생각했다. 내가 저 남자를 생각보다 더 잘 알고 있었구나.
#11
- 247-248p.
이제 그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그와 함께 있는 데에도, 함께 있지 않는 데에도 특별한 이유가 필요했다.
그는 친구와 적 모두 자신의 존재를 난처하게 여긴다는 생각이 들어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점점 더 늘어났다.
그러다 보니 일종의 무기력감이 그를 엄습했다. 그는 최선을 다해 강의를 했지만, 1학년과 2학년 필수과목의 단조로움이 그의 열정을 고갈시켜 하루 일이 끝나고 나면 완전히 지쳐서 멍해졌다.
- 249-250p.
이제 나이를 먹은 그는 압도적일 정도로 단순해서 대처할 수단이 전혀 없는 문제가 점점 강렬해지는 순간에 도달했다. 자신의 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과연 그랬던 적이 있기는 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떠오르곤 했다. 모든 사람이 어느 시기에 직면하게 되는 의문인 것 같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의문이 이토록 비정하게 다가오는지 궁금했다. 이 의문은 슬픔도 함께 가져왔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이나 그의 운명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반적인 슬픔이었다. (그의 생각에는 그런 것 같았다). 문제의 의문이 지금 자신이 직면한 가장 뻔한 원인, 즉 자신의 삶에서 튀어 나온 것인지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나이를 먹은 탓에, 그가 우연히 겪은 일들과 주변 상황이 강렬한 탓에, 자신이 그 일들을 나름대로 이해하게 된 탓에 그런 의문이 생겨난 것 같았다. 그는 보잘것없지만 지금까지 자신이 배운 것들 덕분에 이런 지식을 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우울하고 역설적인 기쁨을 느꼈다. 결국은 모든 것이, 심지어 그에게 이런 지식을 알려준 배움까지도 무익하고 공허하며, 궁극적으로는 배움으로도 변하지 않는 무(무)로 졸아드는 것 같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12
- 252p.
그해애, 특히 겨울에 그는 자신이 그처럼 비현실적인 상태를 맛보는 시간이 점점 더 늫어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마음만 먹으면 몸에서 의식을 분리시킬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을 지켜보았다. 잘 모르는 사이인데도 묘하게 친숙한 누군가가 자신이 해야 하는 묘하게 친숙한 일들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전에는 이런 식으로 자신이 분리되는 느낌을 겪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이 일이 고민거리가 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냥 멍하기만 했다. 이 일이 중요하다고 자신을 납득 시킬 수 없었다. 이제 마흔두살인 그의 앞날에는 즐겁게 여길 만한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뒤를 돌아보아도 굳이 기억하고 싶은 것이 별로 없었다.
마흔세 살이 되던 해에 윌리엄 스토너의 몸은 거의 젊은 청년 시절 만큼이나 호리호리했다. 그 시절 그가 캠퍼스에 발을 내디디며 느꼈던 아득한 경외감이 완전히 사라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해가 거듭될수록 그의 어깨는 점점 더 굽었고, 그는 천천히 움직이는 법을 배웠다.
- 270-271p.
나이 마흔셋에 윌리엄 스토너는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어린 나이에 이미 배운 것을 배웠다. 첫사랑이 곧 마지막 사랑은 아니며, 사랑은 종착력역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
두 사람 모두 수줍어하면서 천천히 조심스럽게 서로를 알아갔다.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고도 하고, 서로에게 손을 내밀었다가 물러나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상대방에게 억지로 자신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두 사람을 보호해 주던 과묵함이라는 막이 한 층씩 떨어져 나가서 마침내 두 사람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지극히 수줍어하면서도 서로에게 무방비하게 마음을 열고 함께 있을 때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지는 관계가 되었다.
스토너는 거의 매일 수업이 끝난 오후에 그녀의 집으로 왔다.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고, 또 사랑을 나눴다. 아무리 놀아도 지치지 않는 아이들 같았다. 그렇게 봄날이 흘러갔고, 두 사람은 여름을 고대했다.
#13
- 293-294p.
두 사람 모두 단호하게 마음을 다잡고 있었기 때문에 함께 보내는 시간은 한결 더 강렬해졌다. 두 사람은 그 어느 때 보다 서로에게 가까워졌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속으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 말이 사실임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사실은 스스로를 위로 하기 위해 꺼낸 말이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두 사람은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으며, 서로에게 진심을 다하는 것이 필연적인 일이 되었다.
두 사람은 빛이 절반밖에 들지 않는 세상에 살면서 자신들의 좋은 점들을 드러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이 살고 있는 바깥세상, 변화와 지속적인 움직임이 있는 그 세상이 비현실적인 거짓 세상처럼 보였다. 두 사람의 삶은 이 두 세계에 철저하게 나눠져 있었다. 이렇게 분열된 삶을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았다.
늦겨울과 초봄에 두 사람은 함께 있을 때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고요함을 맛볼 수 있었다. 바깥세상이 점점 조여 들어오는 동안 두 사람은 그 세상의 존재를 덜 의식하게 되었다. 함께 느끼는 행복이 너무 커서 바깥세상에 대해 이야기 할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자꾸 침침한 캐서린의 아파트, 육중하고 낡은 주택 밑에 동굴처럼 숨어있는 아파트에서 두 사람은 시간을 벗어나 자기들이 직접 발견한, 시간을 초월한 우주에서 살고 있는 것 같았다.
- 298-299p.
세월이 흐른 뒤 가끔 그는 고든 핀치와 대화를 나눈 뒤 며칠 동안의 일을 회상해 보았지만, 명확한 기억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이 이미 죽었는데도 오로지 고집스러운 의지력 덕분에 습관적으로 움직인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 며칠 동안 자신을 스쳐간 장소들, 사람들, 사건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묘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사람들 앞에서는 자신의 상황이 드러나지 않게 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는 강의를 하고,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고, 빠질 수 없는 회의에 참석했다. 그동안 그를 만난 사람들은 그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고든 핀치의 사무실을 나선 순간부터 그는 알고 있었다. 존재의 작은 중심에서 자라난 무감각한 공간 속 어딘가에서 자기 인생의 일부가 끝나버렸음을. 자신의 일부가 거의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이라서 다가오는 죽음을 거의 차분한 태도로 지켜 볼 수 있을 정도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초봄 오후의 밝고 산뜻한 온기 속에서 캠퍼스를 가로질러 걸어가는 자신을 어렴풋이 인식 했다. 길가와 앞뜰에 늘어선 층층나무들은 흐드러지게 핀 꽃을 매 단 채, 그의 눈앞에서 반투명하고 엷은 구름처럼 가볍게 흔들렸다. 생명이 꺼져가는 라일락꽃의 달콤한 향기가 사방을 흠뻑 적셨다.
캐서린의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그는 열에 들뜬 사람처럼 쾌활하면서도 냉혹했다. 그는 핀치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느냐는 캐서린의 질문을 무시해 버리고 그녀에게 웃음을 강요했다. 그러면서 어떻게든 쾌활한 분위기를 만들어보려는 자신들의 마지막 노력을 헤아릴 수 없는 슬픔으로 바라 보았다. 마치 죽은 시체 위에서 생명이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17 - 380p.
그는 죽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레이스가 떠난 뒤 조급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순간들이 가끔 있었다. 별로 여행을 하고 싶지도 않으면서 여행을 떠나는 순간을 기대하는 사람처럼. 모든 여행자가 그렇듯이, 그도 떠나기 전에 할 일이 아주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일들이 무엇인지 생각나지 않았다.
< 스토너 >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020 (1965 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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