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는 대개 승자의 기록이거나,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주인공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조선 역사상 가장 잔인한 골육상쟁 중 하나인 '계유정난(癸酉靖難)'을 떠올릴 때, 우리의 시선은 늘 세조의 잔혹함이나 비운의 왕 단종에게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김별아 작가는 시선을 돌려, 열다섯의 나이에 동갑내기 남편과 이별하고 홀로 60여 년을 더 살아야 했던 여인, 정순왕후 송씨의 삶을 이야기한다.
제목인 '영영 이별 영이별'은 단종과 정순왕후가 청계천 영도교(永渡橋)에서 나눈 마지막 이별에서 따왔다. 한 번 건너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 그 다리를 기점으로 여인의 삶은 온통 밤이 되었다. 소설은 정순왕후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과거를 회상하는 독백 형식을 취하며 독자를 그 참혹한 고독의 한복판으로 이끈다.
이야기의 전개가 정순왕후를 단순히 동정심을 유발하는 '비극의 희생양'으로만 그리지 않았다는 점이 인상깊었다. 신분은 왕비에서 '군부인'으로, 다시 노비로 추락했지만, 그녀는 단 한 순간도 세조와 그 권력자들 앞에 무릎 꿇지 않았다. 세조가 내린 식량과 집을 거부하고, 동망봉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자줏빛 물을 들이는 염색 노동으로 스스로 생계를 이어간 모습은 서슬 퍼런 인간의 존엄을 보여준다. 그녀에게 삶은 연명이 아니라 '증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지...
남편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이들이 권력의 꿀을 빨다 먼저 죽어가는 모습을, 그 자손들이 업보를 치르는 모습을 두 눈 똑똑히 뜨고 지켜보는 것 자체가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처절한 복수이자 투쟁이었을 것이다. 김별아 작가는 정순왕후의 내면을 한 자 한 자 밀도 있게 서술했다. 소설의 마지막, 여든둘의 나이로 숨을 거두며 마침내 영도교 다리를 다시 건너 단종에게로 향하는 송씨의 임종 장면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그녀에게 열여섯 이후의 삶은 온통 시린 겨울이자 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밤을 도망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낸 그녀의 삶은 결코 초라하지 않았다.
《영영 이별 영이별》은 단순한 역사 소설을 넘어, 거대한 폭력 앞에서도 부러지지 않는 인간의 존엄성이 무엇인지를 절절하게 보여주는 것 같았다. 비극적인 역사 속에 가려져 있던 정순왕후 송씨라는 한 여인의 고독하고도 찬란했던 불꽃을 이야기한다. 잔인한 운명 앞에서도 부러지지 않고 꼿꼿하게 자리를 지킨 한 인간의 위대한 정신에 대한 오마주이자, 권력이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권력이 짓밟고 간 자리에서 피어난 슬픔이 어떻게 고결한 빛을 띠게 되는지 이 감정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있을 것만 같다.
■ 본문 중에서
기다리세요, 당신. 내가 곧 갑니다. 더는 외롭고 쓸쓸하지 않으실 거예요. 잠시만, 우리가 헤어져 견뎌온 수많은 날에 비기어 찰나에 지나지 않을 아주 잠시만, 거기서 날 기다려주세요. - 19p.
사람은 결국 삶을 이기고 승리자가 될 수 없는지도 모릅니다. 그 쟁투에서 이기는 것은 오직 삶, 그 자체이겠지요. - 96p.
- 104p.
보고 싶다!
미치도록,
보고 싶다......!
뜨거운 삶의 황홀도 도취도 매혹도 애욕도 모두 다 끊겨나간 후, 그가 한겨울의 칼바람이 쌩쌩 부는 외딴 섬에서 죽음에 직면하여 애끓게 그리워한 사람은 바로 정처인 신씨였다 하더이다. 그것조차 사랑이었을까요? 겁파를 두고 이어진 부부의 모진 연분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과 참회였을까요? 그도 저도 아니라면 서른한 살의 나이에도 끝내 어른이 되지 못한 허울만 큰 어린아이의 칭얼거림이었을까요?
- 125p.
살아가는 일이 온통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습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미워하는 일도, 죄를 짓고 벌을 받는 일도, 살아서 누리고 죽으며 놓고 가는 일도, 한 번 빠져들면 쉽게 나올 길을 찾지 못하는 거대한 미궁에 갇힌 것만 같습니다.
기어코 이 미어를 풀어보겠노라 머리가 터져라 골몰할 때까지, 나는 아직 젊었던가 봅니다. 다를 사로잡은 비운을 해명해 보겠노라 전전반측 밤을 지새울 때에, 나는 여전히 삶의 비밀을 모르는 철부지였던가 봅니다. 내가 당한 모든 일들이 나의 무력소치인 것만 같아, 나는 메밀 베개로도 식힐 수 없는 뜨거운 머리로 늘 어질병을 달고 다녔습니다.
- 140p.
당신, 나를 다시 만나면 칭찬해 주셔요. 왜 이제야 왔나 탓하지 마시고 그동안 수고했다 애썼다 다독다독 어깨를 두들겨주셔요. 나는 죽지 않았습니다. 죽을 수가 없었습니다. 삶의 아름다움을 칭송할 수는 없을지언정 질기고 모진 목숨을 이어 이만큼이나 오래 살아내고야 만 것이, 결국 내게 허락된 유일한 복수였으니까요.
- 197p.
낯선 것은 두렵습니다. 낯선 것은 불안합니다. 열다섯의 나는 낯선 거처에서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 낯선 이름으로 불리며, 먹어도 살이 되지 않고 자도 피곤이 풀리지 않고 정중한 의식으로 대접받아도 몸 둘 바를 몰라 전전긍긍하였습니다. 부풀린 어여머리에 짓눌린 목은 자꾸 움츠려 낮아지고 염통은 사나운 손길에 꽉 쥐어 잡힌 듯 옥아들곤 하였습니다.
- 232p.
사람들은 이 다리를 영이별 다리라 부른답니다. 지금은 그 때처럼 삐걱대는 나무 다리가 아닌 돌다리로 모습이 변했지만, 당신과 내가 영영 이별하ㅣ였다 하여 영영 건넌 다리라고 부른답니다. 애초의 영미교란 이름 대신 그토록 슬픈 별칭을 얻게 된 이 다리를, 문자 좋아하는 사람들은 영원히 건너가신 다리라 하여 영도교(永渡橋)라고 하더이다. 영이별 다리, 영영 이별 다리...... 이름을 곱씹는 것만으로도 설움이 복받치는 낮고 초라한 다리.
<영영이별 영이별>
김별아 장편소설
해냄, 2014
"본 포스팅은 교보문고 VORA서평단 활동의 일환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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