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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지/추억의 책장 · 메모

데이지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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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주춤거리며, 반가운 듯 들어온 사람의 얼굴 얼굴이 먹는 사이에 바뀌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다.
말다툼을 하고 왔든, 묵묵히 침묵하다 왔든, 표정이 누그러지면서 그 사람 원래의 얼굴이 되어 간다.
징그러운 사람은 더욱 징그럽게, 뻔뻔한 사람은 더욱 뻔뻔하게, 
처음에는 아무 표정 없던 사람이 가게 안에서 마침내 자기 속내를 드러내며 변해 간다.
연기 너머로 그런 모습들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참 좋은 인생이었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내내 같은 일을 해 왔는데 지겨웠던 적은 없었다.

나는 침대가 있는 조그만 방에 들어갔다.
하얀 시트가 깔린 침대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꼭 닫혔던 천장의 창고 문이 휙 열리면서 아래로 축 늘어졌다.
그리고 안에서 후드득 무언가가 떨어졌다.
나는 벌떡 일어날 정도로 놀라서, 정말 눈을 뜨고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벌떡 일어났더니, 내 방이었다.
꿈에서 뛰쳐나올 때 천장에서 떨어지는 것들이 얼핏 시야에 스쳤다.
그것은, 사진이었다.
무슨 사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빛바랜 사진이 무수히 떨어졌다.
현실에서도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둠 속에서 숨을 고르고, 이미 꺼진 촛불의 달짝지근한 거스름 냄새를 느꼈다.
잠시 깨어 있자고 생각했다. 
이제 그 꿈속으로는 가고 싶지 않았다.


<데이지의 인생>
요시모토 바나나 글, 나라 요시토모 그림, 김난주 옮김
민음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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