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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지/추억의 책장 · 메모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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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서의 길

J, 가끔 우리는 이게 절벽인 줄 알면서도 그 위에 서서 뛰어내리고 싶어 한다고 당신은 제게 말했습니다. 가끔 우리는 이것이 수렁인 줄 알면서도 눈 말갛게 뜬 채로 천천히 걸어들어 간다고. 가끔 머리로 안다는 것이, 또렷하게 알고 있다는 것이 이렇게 속수무책일 때가 있다고, 또 이렇게 하면 그와 끝장이 나는 줄 알면서도 우리는 마지막 말을 하고야 만다고 그대는 제게 말했습니다.
그대의 말이 귓가에 남아 있습니다. 평안하시죠?


# 생명의 찬가

나이를 먹어 좋은 일이 많습니다. 조금 무뎌졌고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 있으며 조금 더 기다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 자신에게 그렇습니다. 이젠,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말하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고통이 와도 언젠가는, 설사 조금 오래 걸려도, 그것이 지나갈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고 문득문득 생각하게 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학대가 일어날 수도 있고, 비겁한 위인과 순결한 배반자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한다고 꼭 그대를 내 곁에 두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 한 덩이의 빵과 한 방울의 눈물로 다가가는 사랑

J, 한때는 사랑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해 심장을 무디게 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었습니다. 누군가 물으면 대답했지요. 나는 그런 감정의 소모가 싫거든요, 하고. 그리고 평화롭다고 생각했지요. 아무도 나를 상처주지 못할 거라고. 감정의 철갑을 두르고 의기양양해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고 다친 영혼을 절둑이는 친구들을 보며, 음, 넌 아직 어리군...... 뭐 이런 생각도 했음을 고백합니다.


# 공평하지 않다

그렇습니다. 공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공짜로 작은 이벤트에 당첨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고 공짜로 좋은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고 공짜로 밥도 먹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혹 공평한 것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J, 그러나 머리로 깨달아 내 마음이 궤도를 비틀기 시작했다 해도 그것이 하루아침에 그렇다, 라고 제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압니다. 계절 하나가 봄이 되려고 하는 당연하고 장엄한 진리 앞에서도 겨울은 그렇게 우리에게 쉽게 봄의 자리를 내주지는 않습니다. 뒤척이고 비 뿌리고 바람 불면서 추웠다가 따스했다가 다시 바람이 붑니다. 그리운 J, 오늘도 그렇습니다.


# 하늘과 땅 사이

J, 세상이 나를 두고 안 돼, 안 돼 하는 날이 있습니다. 나무들이 서서 킬킬거리며 나의 어리석음을 비웃고 바람조차 휑하니 날 두고 저희들끼리 몰려가버리는 그런 날이. 청소기로 방을 밀고 걸레로 먼지를 닦다가 이게 뭐야, 이게 뭐야, 주저 앉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 …
J, 저는 요즘 가끔 행복이란 무엇이고 불행이란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행복하겠다, 짐작하는 사람들에게서 불행의 기미를 알아차리게 되고, 불행할 거라 확신했던 사람들에게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평화를 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저 자신에게 그러한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가지면 행복할 것 같아 모든 것을 지불하고 가져왔던 것들이 제게 불행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반대로 그것을 놓아버리면 죽어버릴 것 같아 움켜쥐고 있던 것을 놓아버리자 뜻밖에도 자유와 평화가 온 것입니다.


#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J, 가끔 제정신이 드는 날에는 살아 있는 나날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정말 나이가 들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이제사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되어서일까요. 만일 내가 느닷없이 1년만 살게 되었다는 선고를 받는다면, 하는 생각을 요즘은 자주 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나는 진정 무엇이 하고 싶을까요.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공지영 산문집
황금나침반,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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