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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지/책 더하기 · 리뷰

[李外秀 감성사전] 질식된 언어의 소생(蘇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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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사전
국내도서>비소설/문학론
저자 : 이외수
출판 : 동숭동 2006.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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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

언어는 생물이다.
원고지는 삼라만상이 비치는 종이거울이다.

짧은 토막 글로 시작하는 이 책은, 언어 하나 하나를 이외수 선생의 감성으로 풀어 엮어낸 사전. 이름하여 '이외수 감성사전(李外秀 感性辭典)이다. 사전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책의 맨 뒤에는 찾아보기(색인, 索引)까지 제공한다. 바쁜 인생사, 고달픈 세상사에 치이고 치 받힌 애독자들을 위해, 그들의 감정의 우물이 바닥났을 때, 감성 촉촉한 언어를 찾기 쉽도록 말이다. 

빗방울 떨어지는 장마철 조용한 카페에 앉아 촉촉한 책장을 한 장씩 넘기다 보니 이내 가슴까지 촉촉해지는 기분이다. '겨울'은 겨울이 아니요, '출발(出發)'은 출발이 아니며, '인간(人間)'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이성(理性)과 지성(知性)에 의해 기억 속에 암묵지(暗默知)로 내재(內在)하고 있던 해묵은 지식들은 모두 죽었다. 감성(感性)이 깃든 언어는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 받아 또 다른 의미로 탄생한다. 단 예외는 존재했으니 '사랑'은 그대로 사랑이었다. 온 천지를 둘러보아도 반대말이 없는 '사랑' 말이다.

그의 언어는 종이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 유쾌한 놀이터요, 발칙한 창의력의 소산(所産)이다. 이외수 선생의 언어에 깃든 혼백(魂魄)은 독자들의 가슴에 한 땀 한 땀 새겨지고, 고요히 메아리 친다. 여기. 비 오는 이 여름 밤에...


■ 본문 중에서

# 연(鳶) - 11p.
겨울이 오면 유년의 꿈결 속을 떠도는 바람의 혼백이다. 가지 마라. 가지 마라. 마른 쑥대풀은 소매 끝을 부여잡고 흐느끼는데 아이들은 언덕배기에 올라 연을 날린다. 공허한 세월 속으로 소멸의 강이 흐른다. 시어(詩語)들이 죽고 바람이 분다. 낭만이 죽고 바람이 분다. 사랑이 죽고 바람이 분다. 하늘이 흔들린다. 그리움이 흔들린다. 그리움은 소망의 연이 되어 하늘 끝으로 떠오른다. 하늘 끝으로 떠올라 인연의 줄을 끊고 영원한 설레임의 노래가 된다.

# 출발점 - 44p.
과거를 끊어낸 자리. 미래의 생장점(生長點). 현재 바로 그 자리. 윤회의 매듭점.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 떠나는 자리. 시간과 공간의 소실점(消失點). 인생의 모든 새벽.

# 자물쇠 - 49p.
인간들은 때로 마음의 문에까지 자물쇠를 채운다. 자물쇠를 채우고 스스로가 그 속에 갇힌다. 마음 안에 훔쳐갈 만한 보물이 빈약한 인간일수록 자물쇠가 견고하다. 

# 동지(冬至) - 53p.
시간이 결빙된다. 세월이 정지한다. 숲이 해체된다. 들판은 백설에 덮여 밤에도 눈부시고 하늘은 빙판 같아서 달빛이 더욱 시린데 강물은 얼음 밑에서 속삭임을 죽인다.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이다. 가슴에 아직도 그리움이 깊은 상처로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면의 고통도 가장 긴 날이다.

# 꽃 - 89p.
초목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위해 신(神)에게 드러내 보이는 마음의 참모습이다. 눈부신 찬양이다. 향기로운 노래다. 피울음 끝에 벙그는 해탈의 등불이다.

# 계급 - 102p.
인간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계급을 만들고 스스로 노예로 전락해서 그 존엄성을 상실한다.
모든 조직은 계급이 인간에 우선하기를 바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사랑 - 117.
반드시 마음 안에서만 자란다. 마음 안에서만 발아하고 마음 안에서만 꽃을 피운다. 사랑은 언제나 달디단 열매로만 결실되지는 않는다. 사랑에 거추장스러운 욕망의 덩굴식물들이 기생해서 성장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나를 비우고 너를 채우려 할 때 샘물처럼 고여든다. 그 샘물이 마음 안에 푸르른 숲을 만든다. 푸르른 낙원을 만든다. 온 천지를 둘러보아도 사랑의 반대말이 없으며 온 우주를 살펴보아도 아름다움의 반대말이 없는 낙원을 만든다. 사랑은 바로 행복 그 자체다.

# 열등의식 - 133p.
자신이 남에게 자랑할 만한 건덕지를 조금도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생겨나는 우울의 늪지대. 신(神)의 공평성에서 제외된 생활형태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을 비하해서 생겨나는 의식의 지하감옥. 그러나 모든 진보는 열등의식을 그 원동력으로 삼고 있다. 새에 대한 인간의 열등의식이 비행기라는 괴물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한다.

# 이슬 - 153p.
새벽에 내린다. 만물이 깊이 잠든 안식의 새벽에 소리없이 내려와 꿈을 적신다. 신(神)의 서늘한 입김이다. 생명의 속삭임이다. 사물들의 표면에 닿아 물방울이 되고 물방울은 땅에 스미어 옹달샘을 만든다. 옹달샘은 그 흐름을 다하여 바다에 다다른다. 이슬은 바다의 투명한 미립자다. 모든 생명의 기원이다.

# 장맛비 - 160p.
여름 한 철 우기(雨期)를 기해 지속적으로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장맛비다. 세월이 젖는다. 사랑이 젖는다. 방황이 젖는다. 꿈이 젖는다. 범람하는 황토빛 강물 위로 떠내려가는 통곡의 세월. 얼룩진 엽서가 배달되고 약속에 금이 간다. 기억의 서랍 속에도 곰팡이가 피어난다. 유리창 속에서 도시가 흔들린다. 절망이 깊어진다. 시간이 침잠한다. 온 생애가 젖는다.

# 출근 - 168p.
경제적으로 궁핍하지 않은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자신을 인간에서 로보트로 전환시키는 행위. 직장을 가진 인간이라면 대부분 기상과 동시에 출근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힌다. 세면장에 들어가 부품을 소제하고 에너지를 보충한 다음 서둘러 직장으로 달려가 출근부에 도장을 찍을 때까지 모든 작동을 최대한 빠르게 진행시킨다. 비애를 느낄 겨를조차 없다. 반드시 그렇게 살아야만 행복이 보장된다고 입력되어 있는 로보트처럼 매일 같은 일상을 반복한다. 출근은 보금자리로 돌아오기 위해서 보금자리를 일시적으로 떠나는 서민들의 습관화된 이별이다. 외로운 출발이다. 이 세상에 남들처럼 살아남아 있고 싶은 자로서의 소박한 희망이다. 희망에의 도전이다.


<李外秀  感性辭典 | 이외수 감성사전>
이외수 지음
동숭동,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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