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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지/책 더하기 · 리뷰

[외면하는 벽] 서로가 서로를 버리고 외면한 우리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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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하는 벽

저자
조정래 지음
출판사
해냄출판사 | 2012-04-3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급속한 근대화를 통과한 시대의 이야기들!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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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

 

외딴 섬에 갇힌 사상범과 간수의 눅눅한 대화만이 오가던 삶..

기지촌에서 태어난 미군과 (일명)양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의 앞날을 걱정하는 삶..

같이 근무하는 사무실 경리 아가씨의 갑작스런 자살에도 그 어떤 연락처나 사연 또한 알 수 없던 외면하는 삶..

13평 자그마한 아파트에서 이웃에 죽음에 오롯이 슬퍼하지 못하고 장례를 빨리 마무리지으라 독촉하는 야속한 이웃의 삶..

그 모든 삶들이 우리네 그 시절 삶이었음을... ...

 

근대화의 바람이 불던 70년대 말, 우리네 삶은 전쟁의 소용돌이가 한차례 휩쓸고 간 뒤, 삶에 일상에 허덕이느라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던 날들이었다. 게다가 유신정권의 억압속에 사상범이라는 굴레를 쓴채 소리없이 숨죽여 살아가야 이도 적지 않았다. 작가는 이들의 모습을 외면하지 않고 담아냈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를 외면한 채 앞만보고 살아갈 수 밖에 없던 가슴아픈 그 시대에 외면 당한 가엾은 삶들이 있었을 뿐, 누가 그들을 외면했다 과연 비판할 수 있을까. "한정된 시간을 사는 동안 내가 해득할 수 있는 역사, 내가 처한 사회와 상황, 그리고 그 속의 삶의 아픔을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조정래 작가가 서른 두 살에 쓴 글이라고 한다. 작가의 말처럼 그네들의 삶과 그 삶 속의 아픔을 글로 노래로 풀어내주는 것만이 그네들을 외면하지 않는 유일한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그저 역사 속의 이야기로, 교과서 속의 이이기로, 혹은 감히 거장이라 칭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작가들의 글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그 아련한 삶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21세기를 넘어서며 오히려 더 각박하고 야속해지는 세상사에 더 외면당하고 소외받는 이들은 없는지 되돌아 보아야 할 것이다. 얼마전 모 TV프로그램에서 한 연예인이 나누는 삶의 행복함을 강조하고 아동 후원을 독려한 이후로, 해당 단체에 기부 요청이 쇄도했다고 한다. 우리들은 여전히 따뜻한 가슴을 품고 있고, 나눔과 사랑을 내재하고 있음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네 삶에서 그 시절 그 때처럼 외면당하는 삶이 없기를 그저 바라기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삶이 되지 않으려면 이웃을 둘러보고 배려하고 아끼는 마음을 늘 가슴에 담아야 할 것이다.


 

■ 본문 중에서


# 비둘기 - 17p.

그는 가만히 눈을 내려감았다. 최후 진술의 의미가 무엇인가. 말은 말 앞에서 말일 수 있는 것이지 소리 앞에서는 부질없는 소리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었다. 말을 소리로 전락시키는 것만큼 비열하고 치사한 짓이 또 있을 수 있는가. 말은 절대적인 행동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허약하게 만들거나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 우리들의 흔적 - 93p.

사무실, 거기는 사무실이었다. 유흥장이나 사교장이 아니라 사무실이었다. 거기에서 모두는 사무를 보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아무런 어색함도 불편함도 없었다. 오히려 이것저것 서로를 알게 되면 사무를 수행해 나가는 데 번거롭고 불편하게 될지도 모른다. 거기서는 오로지 정확하고 신속한 사무 기능만 갖추면 그만인 것이다.

나는 비로소 내가 커다란 기계의 한 개 부속품인 것을 깨달았다. 월급 생활 1년 반 만에 보게 되는 내 모습이었다.

나는 갑자기 갈증을 느꼈다.

 

# 한, 그 그늘의 자리

그네는 말마따나 몸을 팔아서까지 대학을 나와야겠다는 오기가 고아 신세로 자란 그들의 정상적인 사고 방식인 것이다. 그네는 지극히 정상이다가 어느 순간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비정상으로 둔갑을 했다. 그네 자신도 해명할 수 없는 모순, 그네의 이성을 허깨비로 만드는 그 귀신 같은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 194p.

 

"저어...... 꿈을 많이 꾸시나요?"

"네에?"

예기치 않은 물음이라 태섭은 당황했다. 그러나 무언가 부딪쳐오는 것이 있어 전 신경을 모았다.
"꿈 많이 꾸죠. 야망이 큰 사람일수록 꿈을 많이 꾼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지도 않은데 꿈 부자죠."

"그렇죠? 제 경우도 그래요."

그네는 반색을 하며 동의를 구했고, 곧 미간이 찌푸려질만큼 음울한 표정이 되었다.

무슨 꿈을 그렇게 많이 꾸느냐는 말이 입술에 매달렸지만 태섭은 그 말을 삼켜버렸다. 그네의 표정으로 보아 그 꿈은 흉측한 것일 게 분명했다.

"내 생각으론 꿈이란 야망하고 가까운 것이 아니라 상처하고 친구예요. 아픈 과거의 되풀이가 꿈인 것 같아요."

- 212,213p.

 

# 외면하는 벽 - 259p.

"죽은 사람은 누구래요?"

또 한 여자가 노골적인 호기심을 드러내며 물었다.

"이거 참 큰 야단났네. 시체를 이고 어떻게 잠을 자고 어떻게 밥을 먹나 그래. 재수가 없을래니까 별일이 다 생기네."

금방 시체에서 썩은 물이라도 뚝뚝 떨어지는 듯이 여자는 계속 진저리를 치며 아예 말대꾸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세 여자는 비로소 자기들 바로 위층에 시체가 누워 있다는가정을 제각기 실감하게 되었다. 과연 어떻게 잠을 자고, 어떻게 밥을 먹을 수 있을 것인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칠 일인 것이다.

 

 

<외면하는 벽>

조정래 지음

해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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