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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지/추억의 책장 · 메모

[지구별 여행자] 나는 인도에 갔다, 머릿속에 불이 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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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여행자

저자
류시화 지음
출판사
김영사 | 2002-11-27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나는 여행이 좋았다 삶이 좋았다 내 정신은 여행길 위에서 망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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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이 좋았다.

삶이 좋았다.

여행 도중에 만나는 기차와 별과 모래 사막이 좋았다.

생은 어디에나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켜놓은 불빛이 보기 좋았다.

내 정신은 여행길 위에서 망고 열매처럼 익어 갔다.

그것이 내 생의 황금 빛 시절이었다.

여행은 내게 진정한 행복의 척도를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철학이나 종교적인 신념 같은 것이 아니었다.

신발을 신고 나서면 나는 언제나 그 순간에, 그리고 그 장소에 존재할 수가 있었다.

과거와 미래,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여기에 살아 숨쉬는 것을 가슴 아프도록 받아들여야만 했다.

매 순간을 춤추라.

그것이 여행이 내게 가르쳐 준 생의 방식이었다.

바람을 춤추라, 온 존재로 매 순간을 느끼며 생을 춤추라.

자신이 내딛는 발걸음마다 춤을 추며 신에게로 가라.

학교는 내게 너무 작은 것들을 가르쳤다.

내가 다녀야 할 학교는 세상의 다른 곳에 있었다.

교실은 다른 장소에 있었다.

보리수나무 밑이 그곳이고, 기차역이 그곳이고, 북적대는 신전과 사원이 그곳이었다.

사기꾼과 성자와 걸인, 그리고 동료 여행자들이 나의 스승이었다.

그들이 나는 좋았다.

때로 삶으로부터 벗어나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것, 그것이 내게는 명상이고 수행이었다.

여행을 떠날 때는 따로 책을 들고 갈 필요가 없었다.

세상이 곧 책이었다.

기차 안이 소설책이고, 버스 지붕과 들판과 외딴 마을은 시집이었다.

그 책을 나는 읽었다.

책장을 넘기면 언제나 새로운 길이 나타났다.

그 길들은 반짝이는 눈을 가진 아이들과, 열여덟 살에 벌써 아기 어머니 된 여인들과, 진리를 깨우친 성자들의 동굴로 나를 인도했다.

책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것은 시간과 풍경으로 인쇄되고, 아름다움과 기쁨과 슬픔 같은 것들로 제본된 책이었다.

나는 그 책을 읽는 것이 좋았다.

등장인물들 중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자도 있었고, 학식을 자랑하며 근엄한 체하는 학자도 있었고, 자기를 학대하는 고행승 사두도 있었다.

사리를 휘날리며 들판 끝으로 점점이 사라져가는 여인들도 있었다.

내 여행의 시간은 길고 또 그 길은 멀었다.

여행 중에 나는 진정한 홀로 있음을 알았고, 그 홀로 있음을 통해 세상과 연결되는 법을 배웠다.

내가 언제나 부러워 마지않는 사람은 이제 처음으로 배낭을 메고 새벽의 인도 공항에 도착하는 사람이다.

그의 눈이 곧 맞닥뜨리게 될 삶의 파노라마들, 꽃과 태양, 갠지스 강과 시체들, 머리에 흰 터번을 두른 만년설의 산들과 신의 문양들, 그런 것들을 나는 미리 알고 가슴 두근거린다.

그는 버스 지붕에 올라 앉아 대륙을 가로지르기도 할 것이고, 기차의 차창 밖으로 물동이를 이고 멀어져 가는 인도 여인들의 자태에 매혹 당하기도 할 것이다.

또한 길 위에 떨어진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매 순간 어디로 갈 것인가 망설여야만 하리라.

그리고 어느 싸구려 여인숙에선가 자기 자신과 만나 뜨겁게 해후하리라.

여행은 언제나 좋았다.

여행의 길마다에서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으니, 그것은 하찮은 자기 연민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나는 늘 나 자신을 향해 쓰러졌지만, 또한 나 자신으로부터 일어나곤 했다.

내 생의 증거는 언제나 여행에 있었다.

내가 살아 있음을 가장 잘 증명해 줄 수 있는 것은 곧 여행이었다.

여행 중일 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나 자신일 수가 있었다.

나는 여행이 좋았다. 삶이 좋았다.

여행 도중에 만나는 버스 지붕과 길과 반짝이는 소금 사막이 좋았다.

생은 어디에나 있었다.


- 나는 인도에 갔다, 머릿속에 불이 났기에, 류시화



# 내 친구 여동생의 결혼식 - 27p.

"당신이 방금 읊어 준 그 시에는 아까 말한 제목이 전혀 어울리지가 않소. 제목을 바꾸도록 하시오. 차라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로 하는 게 나을 것이오."

알고 보니 시적 감수성이 대단히 뛰어난 강도였다. 어쨌거나 한 편의 시를 통해 강도들과 우리는 예상 외로 가까워질 수가 있었다. 나는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은근슬쩍 한 팔을 옆에 앉은 강도의 어깨에 두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얼른 팔을 거두었다.


# 새점 치는 남자 - 49p.

"당신은 정말 운이 나쁜 사람이오!"

그는 고뇌에 찬 얼굴로 세 번이나 그 말을 반복했다.

새가 날아간 것이 유감이긴 했지만, 내가 보기에 운이 나쁜건 내가 아니라 그였다. 하지만 새점 치는 남자의 해석은 달랐다. 내가 너무 운이 나빠 뽑을 점괘가 없기 때문에, 새가 충격을 받아 날아가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는 몹시 흥분한 어조로 자기 생애에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주장했다.

자신에게 닥친 불행한 사건을 순간적인 재치로 만회할 줄 아는, 기발하기 짝이 없는 인도 점쟁이였다.

결국 앵무새도 충격을 받은 셈이 되었고, 새주인도 충격을 받았으며, 그 말을 들은 나도 충격을 받았다. 나는 내 나쁜 운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새주인에게 고스란히 앵무새 값을 물어줘야만 했다. 다행히 인도는 앵무새 천지라서 새 값이 그렇게 비싸지는 않았다.


# 성자와 파파야 - 51p.

누군가 나에게 말했다.

이 삶은 나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고. 삶에서 겪게 되는 대강의 줄거리들을 나 자신이 선택해서 태어난 것이라고. 자신에게 필요한 배움을 얻어 더 높은 영혼의 단계로 올라가기 위해......

하지만 누구에게나 어떤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내가 나에게 한없이 낯설어지는 순간, 내가 살고 있는 삶이 내 삶이 아닌 것 같은 순간이.

그 무렵의 내가 그랬다. 나는 삶에 대해 고민했고, 청춘이 다 가기 전에 그 해답을 찾고 싶었다.

길은 보이지 않았다. 사랑의 상처를 받아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을 상실한 점성술사처럼 여행은 고독했고, 자주 나를 절망케 했으며, 때로는 이 모든 것이 무의미한 시간이 아닌가 하는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이제 그만 이 여행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았다.


# 거지 여인 - 109p.

신은 그 거지 여인을 통해 내게 말하고 있었다. 인간은 서로 만져 주어야 한다는 것을. 시인이든 문둥병 여인이든 누구나 만져 주기를 원한다는 것을. 아무도 만져 주지 않는다면 길에 버려진 망고 열매처럼 영혼이 쪼그라들어 버린다는 것을... ...


# 지구별 여행자 - 111p.

아무도 날 알지 못하는, 시간과 공간마저 지워진 낯선 세계로 떠나고 싶다는 것이 내 오랜 꿈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꿈이 실현된 것이다.

집도 마을도 없고, 태양만이 작열하는 무인 지대!

언제까지나 그 곳에 막연히 서 있을 순 없는 일이었다. 어디로든 가야만 했다. 삶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너무 오래 정지해 있을 수 없는 것. 너무 오래 망설이면 오히려 엉뚱한 선택을 하기 마련이다.

나는 배낭을 추스려 메고 터벅터벅 지평선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태양이 즉각적으로 머리꼭지를 지져 대며 집요하게 뒤쫓아 왔다. 그야말로 나는 볼록렌즈에 태워지는 한 마리의 개미나 다를 바가 없었다.

때론 그런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어느 순간 우리는 아무도 없는 진공 상태 같은 곳에 던져진다. 길은 가도가도 끝이 없다. 그곳에선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어딘가를 향해 가는 것조차 무의미하다.


# 인도의 운전수 - 165p.

히피 여행자들 사이에는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다. 히말라야 무산소 등반을 하고, 요세미티 계곡에서 뗏목타기를 하고,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번지 점프까지 해본 뒤에 마지막으로 할 일이 바로 인도에서 운전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 부처 아닌 체하기 - 178p.

지금 나는 깨닫는다. 내가 지나온 모든 길이 하나의 과정이었음을. 내게 필요했기 때문에 그 많은 일들이 일어났음을. 한때 나는 어리석었고, 긴 방황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 모든 것이 하나의 과정이었다. 지금 이 순간, 이 자리로 나를 데려오기 위한 필연적인 단계였다. 그 길 외에 다른 길은 있을 수 없었다.

인도의 뿌나... ...

내 영혼의 스승이 머물던 곳. 이른 새벽이면 강에서 물안개가 피어오르던 곳. 불꽃 같은 삶과 바람 같은 죽음, 그리고 명상이 우리 모두의 화두였던 곳.

그날 아침, 스승의 말 한마디가 화살처럼 와서 박혔다.

"그대는 왜 부처가 아닌 체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언제까지 그렇게 부처가 아닌 것처럼 가장하며 살 것인가?"


# 옴 마니 밧메 훔 

"당신들 여행자들은 왜 그렇게 맨날 바쁘게 돌아다니죠? 무거운 배낭을 메고 하루는 여기 하루는 저기. 그렇게 빨리 다녀서 얻는 게 뭔가요? 다람살라를 3일 만에 떠난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못 본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렇게 말한 뒤 여인은 말릴 사이도 없이 내 목에 그 산호 골동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자, 얼마나 멋져요. 이건 좋은 물건이에요. 가격도 당신에겐 그다지 비싼 편이 아닐 거예요. 이 목걸이를 하면 당신은 앞으로 어떤 일도 '다음'으로 미루지 않게 될 거예요. 이 목거리를 할 때마다 내가 한 말이 기억날 테니까요." - 186p.


한 곳에 오래 머물라. 그래서 그들과 하나가 되고, 똑같은 태양으로 이마를 그을리라. 그것만이 자아의 벽을 허물고 세상과 화해하는 길이다... ... '옴 마니 밧메 훔'과 함께 내 목걸이에 새겨 둘 중요한 여행 수칙이었다.

다람살라를 떠난 나는 곧바로 럭나우 지방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위대한 깨달음의 성취자인 스리 푼자 바바가 가르침을 펴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그 이름을 듣고 그를 만나고 싶었었다.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싶었었다. 그런데 매년 인도를 여행하면서도 늘 '다음'으로 미루고 그곳에 가지 않았던 것이다. 언제나 그곳에 가지 못하는 이유와 핑계들이 있었다.

그 해, 푼자 바바와의 만남은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여러번 그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단 한 번의 만남으로도 그의 불꽃같은 영혼은 내 안의 무의미한 것들을 불태워 버리고도 남았다. 그를 만난 것과 만나지 않은 것은 내 삶에 있어서 너무도 큰 차이였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 생에 다음이란 없는 것이다. 내가 그를 만나고 돌아온 바로 그 해, 푼자 바바는 육체를 벗고 세상을 떠났다. - 187p.


# 순례자의 집 - 188p.

어떤 일이 저만치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조만간 그 일이 내게 일어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한 걸음 한 걸음 그것을 향해 다가갔다. 그것이 저기 길 모퉁이 사라쌍수 아래서 인도의 도둑처럼 눈을 빛내며 내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온통 다른 일들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한 번쯤 찾아오고야 마는 것이니, 그 일이 일어난 뒤에야 비로소 그것이 오래전부터 그 시간과 그 장소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것은 하나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어서, 그 일을 경험하고 나면 누구도 이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


# 나의 인디아 꿈 - 226p.

사실 모든 여행기는 여행자의 것이 아니다. 여행자들은 마치 자신의 스토리인 것처럼 글을 쓰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모든 이야기는 그가 만난 현지인들, 릭샤 운전수, 거리의 아이들, 속임수를 쓴 호객꾼, 그를 집으로 초대한 초면의 우체국장의 이야기다. 심지어 그가 손을 흔들며 작별하고 떠나온 늙은 탁발고행승의 이야기일 뿐, 결코 그 자신의 것이 아니다.

처음에 나는 그것이 나 자신의 경험이고, 내가 주인공인 것으로 착각했다. 이야기의 중심에 내가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주연과 조연, 모든 엑스트라들은 바로 그들이었다.

아니, 이 영화에는 엑스트라란 없었다. 모두가 훌륭한 주연들이었다. 이마에 붉은 점을 찍고, 한 손가락으로 코를 풀고, 태양을 향해 엄숙한 자세로 기도를 올리고, 때로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폼을 잡긴 해도 그들은 그 어떤 할리우드 배우도 흉내 낼 수 없는 탁월한 인생 극장의 배우들이었다. 나는 어색하고, 긴장하고, 두려움에 떨고, 때로는 쓸데없이 거만하기까지 한 엉터리 배우에 불과했다.


# 아 유 해피? - 267p.

행복해지는 단 하나의 길은 우리 자신이 행복해지는 데 필요한 많은 것들을 이미 갖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더불어 지금 이 순간을 살라는 것. 삶을 사랑하고, 상처받기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 행복은 때때로 놀라움과 함께 찾아오며, 자기 자신이 완전히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이 곧 행복임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지구별 여행자>

류시화 지음

김영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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