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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지/책 더하기 · 리뷰

[모랫말 아이들] 전쟁 직후, 어린날의 기억 보따리를 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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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랫말 아이들

저자
황석영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01-01-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장길산, 장산곶매의 저자 황석영의 어른을 위한 동화. 전쟁 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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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느낌표 '책을 읽읍시다' 일곱번째 선정 도서



더불어 살아가는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

오늘처럼 힘겨운 날

혼자 있던 누군가

자기 속의 아이에게로 찾아가는구나.


전쟁 직후의 암울했던 시대상, 그 시절에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황석영 선생님께서 그 때를 추억하며 어른을 위한 동화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내신다. '꼼배 다리', '금단추', '지붕 위의 전투', '도깨비 사냥', '친이 할머니', '삼봉이 아저씨', '내 애인', 낯선 사람', '남매', '잡초' 총 열개의 에피소드를 통해 모랫말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엿볼 수 있다. 이야기에는 전쟁에 등 떠밀려 피난을 다니고, 날마다 시체 태우는 냄새를 맡는 것이 일상이던 나고 자란 마을에 대한 애환(哀歡)이 담겨있다. 우리의 아픈 역사를 잊지 말라는 다음 세대에게 남기는 메시지도 담겨 있는듯 하다.


내가 어른이 되고, 또 30년이 흘러 할머니가 되었을 때, 나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내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스스로를 자라게 한 비밀은 내가 아이었던 때의 바람과 달빛 속에 감추어져 있지 않을까... 하고 기억을 더듬으며...


우리를 키운 비밀은 우리가 아이들이었던 때의 바람과 달빛 속에 감추어져 있다.



■ 본문 중에서


# 금단추 - 30p.

"눈, 눈 온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굴뚝 위로 바람에 흩날리는 재와 같은 작은 말 것들이 가득 차 있었다. 나도 창가에 섰다. 땅에는 젖은 자취가 보였으며 내리자마자 녹아버리는지 눈의 흔적이 없었다. 첫눈이었다. 내게는 그 눈보다도 귀남이가 말을 한 것이 더 신기했다.

"너두 눈 오는 걸 좋아하니?"

귀남이는 나를 힐끗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하늘에서 흰빛이 점점 빽빽해졌다.

"하…… 많이 오네."



# 도깨비 사냥 - 49~51p.

나는 시체의 썩은 냄새를 생생히 기억한다. 거기서는 간장 졸일 때 같은, 그리고 비린 것이 삭는 것 같은 참을 수 없는 냄새가 났다. 발을 오래 씻지 않아 발가락 사이에 끼는 때에서 풍기는 냄새와 같았다. 그런 냄새와 더불어 화로 안에서 머리카락이나 손톱이 타는 듯한 냄새.

전쟁이 온 마을과 거리를 휩쓸고 있을 때에는 사람이 죽건 말건 아직은 두려울 겨를이 없었다. 차츰 산과 들판과 강이나 나무 숲에 대한 눈길이 되살아나고 어느 정도 아이다운 생활이 시작될 무렵에야 우리는 그때를 악몽처럼 깊숙이 간직하고 있는 걸 알아차렸다. 깊은 못에 가라앉은 돌처럼 그것은 묵직했다. 들판 가운데 음산하게 서서 가끔씩 불길한 연기를 뿜어올리는 반쯤 부서진 벽돌 건물은 전쟁 때 그대로였다. 머리 풀고 올라가는 게 뭐지? 그건 히히히, 화장터 굴뚝에서 오르는 연기지 뭐야. 석탄이나 솔가지가 타는 게 아니라 시체가 타구 있단 말야.

별이나 달이나 해는 아주 멀리서 가끔 지거나 뜨거나 사라지곤 했지만, 사람이 죽는 일은 늘 우리 근처 우리 동네 가운데 있었다. 거기서 도깨비불을 보았다는 소문이 많이 나돌게 마련이었다. 



# 잡초 - 142p.

벽에 육중한 쇠바퀴 굴러가는 소리를 들었던 날이었다. 그 때까지 나는 주검을 보지 못했으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사를 가고 포성이 들려오는 것으로밖에 난리를 실감하지 못했다. 아이들은 어른에 보호되어 있고 그런 형편에 대해서 전혀 무방비하고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알처럼 무참하게 깨어져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커서도 어른들이 그때의 난리 얘기가 나오면 밤새는 줄도 모르고 끊임없이 체험담을 엮어나가는 많은 경우를 보았다. 그런데 우리 또래들은 대개는 몸이 불편할 경우 그 시절의 경험을 악몽으로 꾸는 것이다.



# 잡초 - 145~146p.

"미, 미친년이다, 미친년!"

드디어 한 아이가 환희에 가득 차서 숨막힌 듯이 외쳤다. 아이들은 이빨 사이로 웃음을 씹으면서 미친 여자를 따라갔다.

태금이의 옛 모습은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딴 세상에서 온 것 같은 무서운 얼굴이었다. 앙상하게 마르고 볕에 그을은 얼굴 가운데서 눈만이 번들거렸다. 나는 가슴을 졸이며 태금이 앞에서 똑바로 바라보았으나 그네는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그저 울기만 했다. 어머니도 그 꼴을 보고 처음으로 소리를 내어 울었다. 태금이는 영혼이 없어져버린 듯한 얼굴로 온 동네를 매일 쏘다녔다.

사람들은 차츰 그네를 알아보는 모양이었지만 역시 반응은 냉담했다. 기억을 떠올리기에 지쳐 있었고 고작해야 난세에 흔한 일이라는 식이었다.



지금 어른이 되어 나는 알고 있다.

삶은 덧없는 것 같지만

매순간 없어지지 않는 아름다움이며 따뜻함이

어둠 속에서 빛난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모랫말 아이들>

황석영 지음, 김세현 그림

문학동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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