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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지/책 더하기 · 리뷰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 자발적 가난, 그리고 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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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
국내도서>비소설/문학론
저자 : 공지영
출판 : 오픈하우스 2010.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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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샘의 문체를 좋아한다. 선생님의 솔직하고 톡쏘는 문장들도 좋아하고, 가끔은 사색하게 하는 깊은 향이 나는 문장들도 좋아한다. 선생님 신간이 나왔다고해서 예약구매를 했다. 구매하고 기다리고 있으니 선착순 구매자들에게 선생님의 친필 사인본을 보내준단다. :)

그렇게 배송된 책을 받아 읽어내려가다 보니 올해 초부터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라는 제목을 달고 연재를 하셨고 이 책은 그 글들을 모은 책 이었다. 내가 좋아한다는 작가한테 이리도 무심했던가? 왜 어찌 연재 사실도 몰랐을까. 각설하고, 책을 다 읽어내고 뒤늦게야 연재페이지에 들어가서 그간 글들을 보았다. 그리고 선생님이 쓰던 난에 이어 연재를 시작했다던 낙장불입시인의 페이지도 찾아보았다. 요즘엔 시시 때때로 챙겨야 할 것들이 참 많은데, 낙시인의 연재글 덕분에 캘린더에 목록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지리산 주변에 사는 다양한 예술가 선생들을 기반으로 '지리산 학교'가 태동한다. 시문학반, 기타연주반, 목공예반, 사진반 등 아홉 개 과목에 학생들의 학비는 석 달에 10만원, 강사들의 급료는 한 달에 7만원(시문학반은 선생님이 버시인과 낙시인, 두 사람이어서 3만 5천원 씩)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행복학교다!

지리산 행복학교엔 낙장불입 시인(이하 낙시인), 버들치 시인(이하 버시인), 낙장불입 시인의 아내인 고알피엠 여사, 강남좌파형, 꽁지 작가(공지영 샘), 최도사, 소풍 주인, 도법 스님, 수경 스님, 연관 스님의 이야기가 맛깔스럽게 구성되어 있다. 초입부에 굳이 그들이 누군지 알려고 하지 않으면 더 좋겠다고 하셨지만, 읽다보니 그들이 궁금해지는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특히 거의 주인공 격인 낙시인과 버시인의 경우엔 더했다. 

지리산 자락엔 느긋함과 삶에 여유를 찾아서 온 사람들, 혹은 모진 세상사에 상처를 받고 온 사람들, 굳이 말로 붙이자면 자발적 가난을 찾아 온 사람들(?)이 느긋하게 그러나 부지런하게 살아가고 있다. 물질만능주의 잣대로 그들을 바라보자면 낙오된 것처럼 보이는 그들의 삶일지라도, 선생님은 도심에 사는 이들이 마음의 치유를 받고 싶거나 삶이 역겨워질 때 든든한 어깨로 선 지리산을 찾게되고 그들을 찾게된다고 했다. 든든한 어깨로 지켜주시던 부모님을 먼저 떠올리던 것과 같은 이치일지도 모르겠다. 

매일매일 To-Do List를 적어두고 캘린더의 수많은 목록들로 아침마다 울려대는 알람에 정신없이 보내는 요즘. 그들의 삶이 부럽기도 샘나기도 했다. 선생님의 책 리뷰를 적으려고 마음먹고 이것 역시 To-Do리스트에 한 항목에 올라있었는데, 그 일(?)을 처리하려던 느즈막한 오후에 이런 글을 만났다. "축복합니다. 해야할 모든 일 속에도 축복만 가득하세요." 정신없이 무미건조하게 내 할일들을 처리해나가던 나에게 축복을 비는 글이었다. 모든 일들 속에서도 날 축복한다니, 내가 축복받으며 일한다니 그 모든 것들을 즐겁게 해나갈 수 있지 아니한가. 지리산 사람들처럼... 

# 연재페이지 바로가기



# 낙장불입2 - 39p.
한 2년 정신분석을 받은 일이 있었다. 내가 사람으로 인해 병들고 상처 입었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일이었다. 그 때 나는 배웠다. 사람에게 입은 상처는 그 사람에게 다시 상처를 되돌려줌으로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로만 치유된다는 것을 말이다. 아니 꼭 사람이 아니라 해도 생명을 기르고 사랑하는 일이 치유의 길이라는 것을 말이다.
바둑에 골몰하거나 개를 기르거나 축구 혹은 나무 키우기에 미쳐버린 사람에게 중독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이유도 같을 것이다. 함께하는 생명이 있으면 그건 좋은 일이다. 중독이라는 말은 인간이 생명이 없는 존재에게 집착하는 일을 일컫는 것, 그것이 게임이든 약물이든 술이든 돈이든 권력이든 혹은 상대가 원하지 않는 그런 사랑이든 말이다.

# 그 사람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 145p.
"참, 이상한 일이야. 내가 잘나갈 때 아내와 아이들 데리고 제주에 갔다가 우도라는 섬에 간 적이 있었어. 배에서 내리는데 선착장에 아주 작은 간이 커피숍이 있겠지. 들여다보니 반 평도 안 되는 가게에 커피머신 한 대 갖다 놓고 내 또래 되는 남자 둘이 커피를 팔고 있더라구, 낡은 청바지에 구겨진 티셔츠 입고. 그 두 사람이 석양의 부둣가에 앉아 있는데 그들이 피우던 담배 연기가 아직도 기억이 나... ... 나는 그게 그렇게 부러웠다. 그걸 이해할 수 있을까?"
...
"사랑은 내가 약한 것을 알고는 와락 쳐들어왔어.
눈길 가는 곳 어디에나 사랑이었어.
빈자리가 없었어."

# '섬지사 동네밴드' 결성 막전막후 - 313p.
마지막 휴렴은 온 관객이 같이 불렀다. 난 악양에 산다. 난 악양에 산다.
악양, 그것은 지리산의 다른 이름, 그것은 경재하지 않음의 다른 이름, 그것은 지이(智異), 생각이 다른 것을 존중하는 이름. 그것은 느림을 찬양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이름..... 공연 도중에 소주가 나누어지고 구수한 돼지고개 냄새 퍼지는...... 그런 악양에 그들은 그렇게 살고 있었다.

# 지리산 행복학교의 저녁풍경 - 330p.
그것은 내가 힘이 들고 지치고 문득 서러울 때 무작정 길을 나서서 그들에게 달려가는 이유와 같을 것이었다. 가서는 고개를 흔들며 "내가 못살아. 왜 이렇게 게을러? 왜 그렇게 비합리적이야?" 지청구를 주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나는 알고 있다. 그곳은 사람이 사는 곳. 설사 내가 모든 것에 실패한다 해도, 설사 내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외면받는다 해도, 설사 어느 날 내 인생이 이게 뭐야 마음속으로부터 절규가 불길처럼 뿜어져 나온다 해도, 외양간은 텅 비고 과일나무는 쓰러지고 산야가 불타버린다 해도, 그곳을 생각하면 세상에 무서운 게 없고 흐뭇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50만 원만 있으면 될 거야. 그러면 1년치 집세를 내서 집을 얻고 그리고 젓가락이 있으면 돼."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
공지영 지음
2010, 오픈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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